매우 예민한 사람들 1

“남편만 보면 화가 난다”

“얼굴만 보면 남편이 예전에 나한테 잘못한 일들이 다 떠오른다.”

“더는 견딜 수가 없다.”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했고 지금은 일 없이 집에 있다. 성실한 직장인이었고 부인도 배려하는 평범한 배우자였는데, 반년 전부터 관계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듯 덜컥거렸다.

발단은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어느 저녁에 둘이 집 근처 공원에 산책을 하러 갔는데, 아직 봄날이라 조금 쌀쌀한데도 민정씨는 반팔을 입고 나왔다. 이를 본 남편은 “아직 봄인데 당신 왜 반팔을 입고 나왔어? 감기 걸리잖아!” 라고 말했다.

대놓고 한 소리 들은 것 같아 대답을 하려는데 마침 옆집 여자가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남편이 민정씨에게 한마디 하고 말을 자른 것은 바로 옆집 여자 앞에서였고, 민정씨는 타인을 대하는 상냥한 태도와 자신에 대한 태도가 너무 달라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민정씨는 열이 오르며 갑갑증을 느꼈다. 반면 남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코를 골며 자고 있어 남편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기를 무시하고 옆집 여자한테 눈길을 준 것이 갑자기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때도 직장에서 남편은 같은 과 여직원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잠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더니 오히려 “무슨 일이냐?”며 짜증을 냈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민정씨는 20년 전, 10년 전, 3년 전에 있었던 서운한 일을 한꺼번에 쏟아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 거의 반년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되었고, 남편도 점점 지쳐갔다.

참고: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들려주는 당신 마음에 대한 이야기/ 전홍진

- 삼성서울병원 교수의 1만여 명의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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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예민한 사람들 1

- 전문의 조언

사람의 기억은 참 오묘합니다. 방금 들은 이야기나 본 것의 대부분은 얼마 후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게 됩니다. 한 달 전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 내용이 얼마나 기억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만났다는 사실 자체만 기억하지 그 내용을 세세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친 기억은 잊히지 않아 그 장소를 스치기만 해도 생각납니다. 또 자신과 심하게 다툰 사람은 그 후로 전화 한 통 안 했는데도 수십 년 동안 얼굴을 잊어먹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뇌는 기억과 관련해 매우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각의 능력’이라고 하지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머리도 좋아 만족할 것 같지만 실제로 불편할 때도 많다고 합니다.

예민한 사람은 우리 뇌의 기억하는 부분을‘불안’으로 강화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기억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지금 느끼는 불안으로 인해 사실보다 더 강하게 각색되는 일이 흔합니다.

민정씨가 남편의 과거 일을 떠올리면 현재 느낀 감정에 의해서 더 못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네이처> 지에 실린 한 논문에 의하면 우리 뇌의 변연계가 공포나 불안의 기억을 회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변연계에서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연결시켜 불안이 심해지면 우리 몸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많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인지 기능을 떨어뜨려서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는 데 지장을 줍니다.

이전에 제가 있는 연구팀에서 우울증 환자 164명을 대상으로 12주간 연구를 진행했는데, 우울과 불안이 호전되면 기억력도 저절로 호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하고 불안할 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왜곡될 때가 많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민정씨의 나이입니다. 52세는 폐경이 올 무렵입니다. 배꼽에서 머리 쪽으로 열이 올라오고 호흡이 답답해지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열이 나고 호흡이 곤란해질 때는 더 화가 나며 예전의 기억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것을 폐경기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결국 중요한 사실은 과거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남편에 대한 분노는 자신의 현재 불안, 폐경기 증상과 떼어놓고 보기 힘듭니다.

‘내가 불안하구나’ ‘예민하구나’를 먼저 인정한 뒤 서운한 생각이 계속 들면 과거의 기억을 연결시키는 것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에 한해 남편과 대화하고 오해는 바로 푸는 것이 좋습니다. 완전히 오해를 푼 후에는 다시 거론하지 않고요.

물론 민정씨 남편도 잘못한 게 있습니다. 아내가 잠을 못 자고 불안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서운할 만합니다.

제가 한 가지 방법을 권해볼게요. 매일 오후 6시가 되면 남편이 전화나 문자로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둘이 함께 있기 보다는 각자의 스케줄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예민한 사람은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과거의 기억을 연상해서 현재와 연결 짓는 것은 스스로를 더 예민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과거 일이 자꾸 생각나면 내가 예민하지 않은지 먼저 체크해야 합니다. 이때는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게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책을 읽거나 운동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심이 전환되면 자연히 기억의 연상과 화는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참고: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들려주는 당신 마음에 대한 이야기/ 전홍진

- 삼성서울병원 교수의 1만여 명의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