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죽음을 비롯한 몇 가지 현존재의 조건을‘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고 표현하였다.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은 어떠한 인간적인 해명도 불허한다. 태어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게 마련이라는 표현 외에 그것에 대해 궁극적인 해답을 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죽음은 성(性)과 마찬가지로 생명에 속해 있으며, 죽음과 성(性)은 우리의 현존재의 근원에 있어서비밀일 뿐이다(Jaspers, 1965).

그래서 야스퍼스는 죽음을 비롯한 몇 가지 현존재의 조건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현상이 항상 한계상황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즉 객관적 사실로서의 죽음은 아직은 한계상황이 되지 않으며, 죽음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한계상황은 없다.

또한 죽음의 사실을 예감하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피하여야 하는가 라는 염려만 갖게 된다면 이 또한 한계상황이 될 수 없다. 즉 시간을 통해 역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현존재와 죽음의 사실은 결국에 겪게 될 고통과 깨달음을 통해서만 실존의 현상적인 면과 관련을 갖게 되고, 이 때야 비로소 죽음은 한계상황으로 인식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과 의식을 통해 사실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는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야스퍼스는 “현존재로서의 종말에 대한 고통은 지양할 수 없지만, 실존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통해서 그 고통을 극복할 수가 있다.”라고 하여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주목하는 죽음은 현존재의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Nichtmehrsein) 혹은 무(Nichts)로 서의 죽음이다. 비존재 혹은 무로서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불안은 생명체의 비존재에 대한 불안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는 어떠한 의학적 치료나 죽음에 대한 지식(Wissen)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오직 철학함(Philosophieren) 즉 실존적 사실성의 순간 순간의 현전(現前, presence)을 통해서만 치유 가능하다.

그런데 죽음의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 죽음 앞에 있는 자에게 손쉬운 위로나 불사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철학함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어떤 확정적인 해답이나 영원불변한 진리를 의미한다기보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실존적 태도의 성실 및 그 결과에 대한 확신이라 할 수 있다.

야스퍼스의 표현대로, 참된 것은 철학적 사상 속에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사상과 더불어 스스로 자기를 의식하게 되는 역사적 실존 속에 비로소 있기 때문이다(Jaspers, 1965. 우정길, 1997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