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커뮤니티
자유게시판
작성자 | 김송호 | 작성일 | 2020-11-11 |
---|---|---|---|
제목 | 머리 염색하시죠 | 조회수 | 1366 |
첨부파일 | |||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숱이 많은 반면에 유난히 새치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때 별명도 하르방(제주 사투리로 할아버지)이었다. 물론 하르방이라는 별명은 머리에 새치가 많았기도 하지만, 말이 없고 하는 짓이 좀 어른스러워서(?) 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젊었을 때도 새치가 많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급속히 새치가 많아져서 40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새치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검은 머리가 많다고 우기고 있지만,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나에게 얼굴은 그대로인데 머리만 하얘졌다고 한 마디씩 하면서 염색을 하라고 권하곤 한다. 물론 대부분은 직접적으로 ‘염색 좀 하지.’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염색을 하면 훨씬 젊어 보일 텐데~~~’라고 은근히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면 나는 어느 선견지명 있는 분이 했다는 ‘대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은 대머리가 되고, 흰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은 흰머리가 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머리 염색을 단호히 거부하곤 한다. 그러면서 농담 삼아 나는 벌써 흰색으로 머리 염색을 했노라고 우기곤 한다. 또 내가 만약 머리 염색을 해서 지금보다 훨씬 젊어(어려?) 보이면 중고등학생들이 친구인줄 알고 맞먹으려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짐짓 너스레를 떨곤 한다. 실제로 나는 머리 염색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추호도 없다는 얘기는 혹시 해볼까 하는 생각 자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아마 앞으로도 머리 염색을 하는 일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체적인 이유에서다. 나는 유난히 두피가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샴푸도 무자극성 내지 저자극성을 사용하고 있다. 자극성이 있는 샴푸를 쓰면 두피가 간지러워서 계속 긁게 되고, 비듬이 많이 떨어진다. 이렇게 두피가 민감하게 된 이유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살 때 소독이 안 된 동네 아저씨 이발 기구(바리깡?)로 머리를 깎는 바람에 피부병(득?)이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다 나았지만, 그 피부병 때문에 사춘기 때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내 성격이 더 내성적으로 변하게 되었었다. 아무튼 내 민감한 두피 때문에 염색을 하게 되면 아마 몇 번 하지 못하고 그만 두게 될 것이 뻔할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린 상태다. 이런 내 변명을 듣는 몇몇 사람들은 요즘 염색약이 좋아져서 자극성이 덜 하다고 충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학공학을 전공한 내 소견으로는 아무리 염색약이 천연 원료를 사용해서 저자극성이라고 해도 내 민감한 두피에 자극을 줄 정도는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자극성 있는 염색약을 사용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나빠지고 있는 내 눈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도 좋은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나는 극도의 근시인데다 나이가 들면서는 원시까지 겹쳐서 다초점 렌즈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조금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안경알의 무게가 무거워서(최대한 압축을 해도) 안경테를 폼 나는 얇은 테로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만약 염색약을 잘못 사용하여 눈이 더 나빠지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경우에는 책을 읽고 강의를 하는 게 취미이자 앞으로 생계수단인 마당에 눈이 머리색보다 훨씬 중요한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남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흰 머리야말로 나의 노숙함을 보여주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두 번째로는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는 나이 든다는 것을 환영하지도 않지만 거부하지도 않는다. 나는 젊게 보이기 위해 머리 염색을 할 정도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체념하거나 포기한 상태는 결코 아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 정도로 생각도 젊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젊음이 간다고 한탄하면서 어떻게 하면 노화를 멀리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할 정도로 젊음에 대해 절대적인 애착을 갖고 있지도 않다. 한 마디로 내 나이보다 젊게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은 하되,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노화 현상은 받아들인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흰 머리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노화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더 나아가 나의 흰 머리가 나의 지식과 연륜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되, 젊은이들이 갖지 못하는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나타내주는 흰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은 것이 나의 머리 염색 거부 이유다. 내가 흰 머리라고 하니까 백발을 연상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내 흰 머리는 그야말로 검은 머리에 흰색 브릿지 염색을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디까지가 흰 머리고 어디까지가 새치냐 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귀 옆의 머리카락이 하얘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새치라고 우기기를 그만 두었다. 그 전에는 자식들이 새치를 뽑아주면 새치 한 가닥 당 얼마를 줄 거냐고 묻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을 안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점이 바로 귀 옆의 머리카락이 하얘지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또 그 비슷한 시기부터라고 생각되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내 머리가 하얘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흰 머리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 머리가 하얘진 것을 충격적으로 실감하게 된 것은 어느 날 지하철에서 어린 학생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났을 때였다. 아마도 내 흰 머리를 보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였을 거라고 생각은 된다. 그 때 나는 아직도 이렇게 착한 학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도,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무조건 다음 정거장에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충격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다시 지하철을 탈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는 지하철을 타면 가능하면 경로석 근처에 서서 가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제 내가 흰 머리니까 경로석에 앉을 자격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로석 앞에 서 있으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흰 머리를 사랑한다. 나는 앞으로도 나의 흰 머리에 중후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흰 머리가 아니라 나의 내면인 것이다. 링컨이 말했듯이 40세 이후에는 내 얼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내면이 행복으로 가득 차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나의 흰 머리도 빛나는 월계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넘치고 흰 머리에는 행복한 세월이 모여 반짝거린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이지 않겠는가.
|
|
![]() |
이전글 | 칭찬하고 감사하면 행복하다 | 2020-11-11 |
![]() |
다음글 | 책 한 권 써 보시죠 | 2020-11-11 |